#. 혜시가 장자에게 말했다. "자네의 말은 쓸모가 없네" 그러자 장자가 이야기했다 "쓸모없음(無用)을 알아야만 함께 '쓸모있음'(用)'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법이네. 땅은 정말로 넓고 큰 것이네. 그렇지만 지금 당장 사람이 쓸모를 느끼는 것은 단지 자신의 발이 닿고 있는 부분뿐이라네. 그렇다면 발이 닿는 부분만을 남겨두고 그 주변을 황천, 저 깊은 곳까지 파서 없앤다면, 그래도 이 발이 닿고 있는 부분이 쓸모가 있겠는가?" - 장자, <외물>
#. 동일한 규칙을 공유한 사람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대화와 토론이란 진정한 의미에서의 대화와 토론일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의 대화와 토론이 아무리 진지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단지 공동체의 규칙을 집단적으로 재확인하는 차원에 머물 수밖에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 중재가 가능한 논쟁은 진정한 논쟁이 아니며, 진정한 논쟁은 중재가 불가능한 것이라는 역설.
#. 서로 화해될 수 없는 두 가지 원리 - 비트겐슈타인
#. 타자와의 관계는 공동체와의 전원적이고 조화로운 관계가 아니며, 우리가 타자의 입장에서 봄으로써 우리 자신이 그와 유사하다고 인식하도록 만드는 공감도 전혀 아니다. 타자와의 관계는 우리에 대해 외재적인 것이다. 타자와의 관계는 하나의 신비와의 관계이다. 그것이 바로 그의 외재성이며 혹은 그의 타자성이다. - 레비나스, <시간과 타자>
#. 마음으로 하여금 타자를 자신의 수레로 삼아 그것과 노닐 수 있도록 하고, '멈추려 해도 멈출 수 없는 것'(不得已)'에 의존해 중(中)을 기르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다. -장자, <인간세>
#. 너는 들어보지 못했느냐? 옛날 바닷새가 노나라 서울 밖에 날아와 앉았다. 노나라 임금은 이 새를 친히 종묘 안으로 데리고 와 술을 권하고, 아름다운 궁궐의 음악을 연주해 주고, 소와 돼지, 양을 잡아 대접하였다. 그러나 새는 어리둥절해 하고 슬퍼하기만 할 뿐, 고기 한 점 먹지 않고 술도 한 잔 마시지 않은 채 사흘 만에 결국 죽어 버리고 말았다. 이것은 사람을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른 것이지, 새를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르지 않은 것이다. - 장자, <지락>
#. ..."나는 옛 삶(故)에서 시작하였고 지금의 삶(性)에서 자라났으며 '운명'(命)에서 완성하였습니다. 물이 소용돌이쳐서 빨아들이면 저도 같이 들어가고, 물이 나를 물속에서 밀어내면 저도 같이 그 물길을 따라 나옵니다. 물의 도를 따라서 그것을 사사롭게 여기지 않습니다. 이것이 제가 물을 건너는 방법입니다.
"제가 육지에서 태어나서 육지에서 편안해진 것이 옛 삶이고, 제가 현재 물에서 자라서 물에 편안해진 것이 지금의 삶이며, 내가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렇게 된 것이 바로 운명입니다." - 장자, <달생>
#. 꿈 속에서 잔치를 연 사람이 새벽에 울부짖으며 눈물을 흘리고, 꿈 속에서 울부짖으며 눈물을 흘리던 사람이 새벽에 (즐겁게) 사냥을 하러 나간다. 꿈을 꿀 때 우리는 자신이 꿈꾸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꿈꾸고 있으면서 꿈속에서 꾼 어떤 꿈을 해석하기도 한다. 우리는 깨어나서야 자신이 꿈을 꾸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단지 완전히 깨어날 때에만, 우리는 이것이 완전한 꿈이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 장자, <제물론>
#. '저것'(彼)과 이것(是)이 자신의 짝을 잃은 상태를 '도의 지도리'(道樞)라고 부른다. 도의 지도리는 '원의 중심'(環中)을 얻어서 무한하게 타자와 감응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옳음(是)도 하나의 무한한 소통으로 정립되고, 그림(非)도 하나의 무한한 소통으로 정립된다. - 장자, <제물론>
#. 아이는 순진무구함이며 망각이고, 새로운 출발, 놀이, 스스로 도는 수레바퀴, 최초의 움직임이며, 성스러운 긍정이 아니던가. 그렇다! 창조라는 유희를 위해선, 형제들이여, 성스러운 긍정이 필요하다. 이제 정신은 자신의 의지를 원하고, 세계를 상실했던 자는 이제 자신의 세계를 되찾는다. -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만물들과 관계할 때 송건은 '선입견으로부터 결별하는 것'(別宥)을 시작점으로 삼았고, 마음의 포용함을 말했으며, 이것을 "마음의 작용"이라고 불렀다. 그는 서로 친숙하고 다같이 기뻐함으로써 온세상을 조화시키려 하였으며, 인간의 본질적인 욕망들'을 설정해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겼다 - 장자, <천하>
#. 우리는 마찰이 없는 미끄러운 얼음판으로 잘못 들어섰던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 조건은 이상적인 것이었지만 그로 말미암아 우리는 걸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마찰이 필요하다. 거친 땅으로 되돌아가자! - 비트겐슈타인, <철학적 탐구>
#. '부득이한 일에만 깃들어라'라는 것은 타자성에 몸을 맡기라는 말이다. 여기서 부득이라는 개념이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글자 그대로 내가 멈출(已) 수 없는 것" 즉, 내가 어떤 노력을 해도 바꿀 수 없는 타자성을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환공이 회당의 높은 곳에서 책을 읽고 있었고, 윤편은 회장 낮은 곳에서 수레를 깎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나무망치와 끌을 밀쳐 두고 올라와서 환공에게 물었다. "공께서는 지금 무슨 말들을 읽고 계십니까?" 환공이 "성인의 말이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윤편이 "그 성인은 살아 있습니까?" 라고 묻자 환공은 "그는 죽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윤편은 말했다. "그렇다면 공께서 지금 읽고 있는 것은 옛 사람들의 찌꺼기가 아닙니까?" 그러자 환공이 말했다. "수레바퀴나 깎는 장인인 주제에 네가 지금 내가 읽고 있는 것을 논의하려고 하는가! 만일 네가 자신의 행위를 변명할 수 있다면 괜찮겠지만,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너는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자 윤편은 말했다. "저는 그것을 제 자신의 일에 근거해서 본 것입니다. 수레바퀴를 깎을 때 엉성하게 작업하면 헐렁해져 견고하게 되지 않고, 꼭 끼게 깎으면 빠듯해서 서로 들어맞지 않습니다. 엉성하지도 않고 꼭 끼지도 않게 작업하려면 저는 그것을 손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대응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입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 제가 저의 아들에게 전달할 수 없고 저의 아들도 또한 저에게서 배울 수 없는 기술이 있습니다. 이것이 나이 70이 되도록 제가 직접 바퀴를 깎고 있는 이야입니다. 옛 사람은 자신이 전할 수 없는 것과 함께 이미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공께서는 지금 옛 사람들의 찌꺼기를 읽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 장자, <천도>
'제물론'에 해당되는 글 2건
- 2008/05/20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 I 강신주
- 2008/05/09 장자와 광우병 이슈 (2)
몇 주째 계속되고 있는 광우병 파동을 보면서 이슈가 확산되는 새로운 경로들과 그 방법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진지하게 고민해보고 포스팅을 하려고 하는데 그 확산 범위가 너무 빠르고 넓게 번지면서 어느새 손 놓고 바라보고 있다;;
이런 고민을 하던 중, 요즘 읽고 있는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이란 책을 읽으며 타인을 이해하는 것과 차이와 토론, 갈등에 관한 현자들의 이야기가 광우병 이슈를 잘 대변하는 것 같아 옮겨본다.
그 이유는, 두 편이 모두 자신의 논리와 근거에 엄청나게 자신이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 믿음에는 흔들림이 없으며, 반대편에서 믿을만한 근거를 대더라도 그들의 핵심적인 가치를 흔들만큼 강한 영향력을 펴지 못할 것이다. 이미 어느 한쪽이 옳다고 믿고 있는 사람에게는 편협한 사고방식만이 점점 더 강하게 뿌리박힐 뿐이다.
정부가 미국산 소고기가 안전하다고 주장할수록 반대편에서는 거짓이라는 증거를 대며 더 강하게 부정하고 신뢰를 떨어뜨릴 것이며, 반대로 미국산 소고기가 위험하다고 주장하는 입장에 대해서 반대편에서는 이것에 대한 반대되는 증거를 제시하며 자신들의 주장만 반복할 뿐이기 때문이다. 이 논쟁이 계속될수록 두 입장에 선 사람들은 서로를 이해시키고(혹은 이해하고) 양보와 타협을 하는 대신 자신의 입장에만 점점 더 빠져들고 만다. 아이러니다.
PR하는 사람으로서 광우병 이슈를 관리하기 위한 키메시지가 무엇일까, 고민하다가도 이렇게 감정적으로 예민해지고 자기 입장이 확고해진 대중에게 과연 먹혀들까 하는 의구심도 생긴다. 한 쪽이 한 쪽을 논리성에 근거해 '설득'을 하기에는 우리 모두가 너무 많이 오지 않았나 싶다. 갈등이 너무 깊다. 상처도 깊고, 흔적도 오래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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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고민을 하던 중, 요즘 읽고 있는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이란 책을 읽으며 타인을 이해하는 것과 차이와 토론, 갈등에 관한 현자들의 이야기가 광우병 이슈를 잘 대변하는 것 같아 옮겨본다.
제가 당신과 논쟁을 했다고 합시다. 당신이 저를 이기고 제가 당신을 이기지 못한다면, 당신은 정말 옳고 저는 정말 그른 것일까요? 반대로 제가 당신을 이기고 당신이 저를 이기지 못한다면, 저는 정말 옳고 당신은 정말 그른 것일까요? 아니면 두 쪽이 모두 옳거나 두 쪽이 모두 그른 경우는 없을까요? 당신이나 저 모두 알 수가 없다면, 이 논쟁을 듣고 있는 다른 사람도 헷갈릴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부탁해서 이런 당혹스런 사태를 판정해 달라고 할 수 있을까요? 당신이나 저 모두 알 수가 없다면, 이 논쟁을 듣고 있는 다른 사람도 헷갈릴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부탁해서 이런 당혹스런 사태를 판정해 달라고 할 수 있을까요? 당신과 생각이 같은 사람에게 판정해 보라고 하면, 이미 당신과 의견이 같은데 그가 어떻게 올바로 판정할 수 있을까요? 반대로 저와 생각이 같은 사람에게 판정해 보라고 하면, 이미 저와 의견이 같은데 그가 어떻게 올바로 판정할 수 있을까요? 당신의 생각과도 다르고 저의 생각과도 다른 사람에게 판정해 보라고 한다면, 이미 당신이나 저와 생각이 다른데 그가 어떻게 올바로 판정할 수 있겠습니까? - 제물론또한 현대 철학자인 비트겐슈타인은 이렇게 말했다.
서로 화해될 수 없는 두 원리가 실제로 마주치는 곳에서, 각자는 타자를 바보니 이단자니 하고 선언한다. 나는 내가 타자와 '싸우게'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나는 도대체 그 타자에게 근거들을 주지는 못하는 것일까? 물론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어디까지 가겠는가? 근거들의 끝에는 (결국) 설득이 있다. (선교사들이 원주민들을 개종시킬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생각해 보라) - 확실성에 관하여현재 광우병 이슈에 있어서, 미국산 소고기 수입을 찬성하는 입장(주로 정부)과 반대하는 입장(주로 진보주의 시민단체 등)은 팽팽히 '싸우고' 있는 중이다. 이슈가 확산되면서 이명박 대통령이 직접 안심시키기 위한 발언을 하기도 하고, 국무총리가 고개를 숙이는 한편 매일 신문 1면에 미국 소가 안전하다는 광고를 내면서 찬성입장이 조금 물러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의 원칙적인 입장에는 변함이 없다는 면에서 이 논쟁은 변함없이 진행중이며, 아마 결과가 어떻게 되든 양측 모두에 엄청난 후유증이 남을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두 편이 모두 자신의 논리와 근거에 엄청나게 자신이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 믿음에는 흔들림이 없으며, 반대편에서 믿을만한 근거를 대더라도 그들의 핵심적인 가치를 흔들만큼 강한 영향력을 펴지 못할 것이다. 이미 어느 한쪽이 옳다고 믿고 있는 사람에게는 편협한 사고방식만이 점점 더 강하게 뿌리박힐 뿐이다.
정부가 미국산 소고기가 안전하다고 주장할수록 반대편에서는 거짓이라는 증거를 대며 더 강하게 부정하고 신뢰를 떨어뜨릴 것이며, 반대로 미국산 소고기가 위험하다고 주장하는 입장에 대해서 반대편에서는 이것에 대한 반대되는 증거를 제시하며 자신들의 주장만 반복할 뿐이기 때문이다. 이 논쟁이 계속될수록 두 입장에 선 사람들은 서로를 이해시키고(혹은 이해하고) 양보와 타협을 하는 대신 자신의 입장에만 점점 더 빠져들고 만다. 아이러니다.
PR하는 사람으로서 광우병 이슈를 관리하기 위한 키메시지가 무엇일까, 고민하다가도 이렇게 감정적으로 예민해지고 자기 입장이 확고해진 대중에게 과연 먹혀들까 하는 의구심도 생긴다. 한 쪽이 한 쪽을 논리성에 근거해 '설득'을 하기에는 우리 모두가 너무 많이 오지 않았나 싶다. 갈등이 너무 깊다. 상처도 깊고, 흔적도 오래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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